[Work free!] 2050년과 정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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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 free!] 2050년과 정어리
  • 박주범
  • 승인 2021.02.24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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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CANVA

해변에 정어리 사체가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약 500㎞ 떨어진 비오비오주 오르코네스에서 일어난 일이다. 비교적 먼바다에 서식하는 멸치와 정어리가 해변까지 밀려와 죽은 이유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칠레 수산양식청 측은 ‘용승’ 현상에 의한 떼죽음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용승은 하층의 차가운 해수가 상층의 따뜻한 해수를 제치고 올라오는 현상이다. 지구온난화로 육지와 바다의 온도 차가 높아지고 바람이 잦아지면서 용승도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심해의 차가운 물이 올라왔고 정어리들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추위가 덮친 것이다.

정어리는 거대한 무리를 형성하여 대규모 이동을 하는 대표적인 어종이다. 개체 하나하나는 굉장히 잘 잡아 먹히는 허약한 종이지만 해류를 따라 산란하기 위해 형성하는 대규모 무리는 그 최대 규모가 km단위에 이르는 대자연의 스케일을 보여준다. 그리고 포식자들을 상대로 보여주는 다채로운 회피기동 역시 장관이다. 포식자들의 움직임에 맞춰 수천 마리가 다채롭게 흩어지고 뭉치는 장면이 경이롭기 그지없다. 작은 크기에 비해 몸에 알차게 들어간 단백질과 지방질 때문에 예로부터 수많은 해양생물들의 훌륭한 양식이 되어 왔다. 그야말로 바다의 쌀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정어리 떼는 남아프리카 해안에 많지만, 가깝게는 동남아 휴양지에서 볼 수 있다. 필리핀 세부 모알보알에서 물안경 쓴 얼굴을 바닷물에 담그고 정어리 떼를 실컷 본 적 있다. 이들은 바다 속에 거대한 동굴을 열었다가, 갈라지며 협곡을 만들기도 했다. 멀리 갔나 하다가도 어느새 배 바로 옆으로 지나가기도 했다. 관광자원 보호를 위해 필리핀 정부는 정어리 포획을 금지하고 있다. 꽤 엄격하다. 한 마리만 잡아도 그 유명한 필리핀 감옥을 구경하게 될 수도 있다. 

포식자들 역시 정어리들을 잡기 위한 전술을 열심히 연구한다. 돌고래는 자기들도 무리를 형성하는 만큼 적절한 팀워크로 정어리 무리의 일부를 대규모 무리로부터 끊어낸 뒤 먹어 치우는 각개격파 전술을 실행한다.

우리나라 앞바다에 정어리가 넘치던 때가 있었다. 1920년대 함경도 연안에 정어리가 너무 많아서 정어리 떼를 섬으로 오인할 지경이었을 정도였고, 300톤급 대형기선이 정어리 떼에 갇혀 항구를 빠져나가지 못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정어리는 꽁치보다 작다. 멸치보다 좀 큰 사이즈에 불과하지만 집단이 거대한 하나의 생물 같이 다닌다. 압도적인 편대를 만들어 고래나 상어 떼와 맞서기도 한다. 고운 결의 파동으로 흩어졌다가 쏜살 같은 빗살 무늬로 다시 뭉친다. 무리 속에 누가 부모형제인지 8촌이내인지, 우익인지 좌익인지 따지지 않고 대형를 만든다. 태평양의 해류를 어떻게 읽고 대이동을 하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반(反)극우주의 풀뿌리 시민운동은 ‘정어리 집회’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수 백만 마리가 떼를 지어 이동하며 자신보다 몸집이 큰 어류에 대항하는 정어리처럼 미약한 시민들이 하나로 뭉쳐 거대한 변화를 이뤄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몸이 굳어 잡아 먹히느니 해변으로 가서 장엄하게 전사하자!’ 칠레 정어리 떼 리더는 영문 모를 차가운 물 속에서 이렇게 무리를 이끌었을 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포식자들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던 군단은 낙오자 없이 해변에 올랐나. 햇살에 은빛 갑옷을 반짝이며 마지막을 함께 맞은 것일까. 

2050 탄소중립이란 말이 헤드라인에 들어간 뉴스가 자주 들린다. 아름다운 정어리 떼 후손들이 걱정 없이 태평양을 종횡무진하는 바다를 다시 돌려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국의 새 대통령도 파리 기후협약에 다시 사인했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지구 평균 기온을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국제적 약속으로 다시 돌아 온 것이다. 앞으로 30년이 보통 중요한 시기가 아닌 것 같다.

2050 거주 불능 지구라는 책도 있다. 정어리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메시지가, 노력해도 이미 늦었다는 핵심이 아니길 바란다.

글. 이인상 칼럼리스트. 항상 세상과 사람과의 소통을 꿈꾸고 있다. 현재 문화미디어랩 PR컨설턴트로 근무하고 있으며, LG그룹 • 롯데그룹 등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했다. dalcom0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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